1년 만에 받은 ‘무죄’ 판결, 웃을 수가 없습니다

이글은 오마이뉴스 2013-05-02일자 기사 ‘1년 만에 받은 ‘무죄’ 판결, 웃을 수가 없습니다‘를 퍼왔습니다.
‘희망버스 취재’ 재판, 대법원까지… “얘들아 미안해”

▲ 2011년 6월 1차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13시간 동안 크레인 아래에 머문 뒤 떠나면서 한진중공업 조합원 가족들과 뜨거운 작별을 나누었다. ⓒ 윤성효

‘무죄일까? 유죄일까?’

머릿속이 복잡합니다. 법원을 향해 달리는 택시에서 기사 아저씨는 제 속도 모르고 계속 말을 붙입니다.

“제가 방송대를 다니고 있거든요. 나이 들어서 공부려니 너무 힘이 들더라고요. 계속 다녀야 할까요? 그만두는 게 좋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 네….”

기사 아저씨 진짜로 웃깁니다. 이런 걸 왜 저에게 묻는 걸까요? 어차피 제가 하라는 대로 할 것도 아니면서요. 좀 조용히 가주면 안 되는 걸까? 하지만 제 바람과 무관하게 아저씨의 이야기는 자식 자랑으로 이어집니다.

제가 법원행 택시를 탄 이유는 형사사건 피고인이기 때문입니다. 지은 죄가 뭐냐고요? 그 이야기를 하자면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갑니다.

2011년 6월 저는 편집국에서 희망버스 동행취재를 요청받았습니다. 희망버스는 한진중공업 해고자들을 응원하려고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탔던 버스입니다. 제가 부산에 도착하니 많은 경찰이 한진중공업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진중공업 담벼락에서 사다리가 내려오고 승객들은 순식간에 그 사다리를 타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저 역시 승객들을 따라 사다리에 올랐습니다.

다음 날 아침, 무대에 오른 엄마들을 보았습니다. 그 엄마들은 해고자 가족대책위였습니다. 마이크를 잡은 한 엄마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엄마는 가슴에 아기를 안고 있었습니다. 세 아이의 엄마인 저로서는 솔직히 갓난아기를 왜 이렇게 위험한 곳에 데리고 왔느냐며 젊은 엄마를 나무라고 싶었습니다.

그 엄마가 제 동생이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슨 말을 해서라도 그 자리에 아기를 데려오는 것만은 말렸을 겁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아기는 돌도 안 된 11개월이었고 전날엔 길에서 노숙까지 했다고 했습니다. 아기를 데리고 노숙을 하면서까지 그 엄마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언지 더욱 궁금했습니다. 그 젊은 엄마의 사연을 기사로 써 올렸습니다.(관련기사 : 11개월 아기의 일상이 왜 이리 힘든 걸까요)

2년 전 희망버스 때문에 시작된 재판, ‘무죄’는 받았는데…

▲ 2011년 11월 크레인에서 내려온 김진숙 지도위원이 꽃다발을 목에 걸고 동료 노동자와 희망버스 관계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 권우성

그리고 4주 뒤, 경찰의 소환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경찰의 조사도 받았고 약식기소가 되어 벌금 200만 원 형을 받습니다. 부당하다는 생각에 정식재판을 신청했습니다(관련기사 : “남편아, 미안해…벌금 200만원 나왔어”).

2012년 5월부터 시작된 1심 재판에서만 총 여섯 명이 증인으로 재판에 참석을 합니다. 검사와 변호사는 증인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확보하기 위해서 같은 질문을 요리조리 바꿔가며 질문을 하고 또 했습니다. 지루했던 여덟 차례의 성남법원행은 벌금 50만 원 형을 선고받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사실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으리라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무죄나 기소유예가 나오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맥이 풀렸습니다. 저에게 취재를 의뢰했다는 내용이 담긴 의 회의록과 제가 작성했던 기사가 증거로 제출되면 무죄 판결을 받을 줄 알았습니다. 판결의 요지는 ‘한진중공업으로 들어간 제 행위가 기자의 취재활동으로 보기에는 사회 상규에 위배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1심 판결이 나고 검사 쪽, 그리고 저희 쪽도 1심 판결이 부당하다는 이유로 항소했습니다.(관련기사 : 내가 ‘벌금 50만원’을 낼 수 없는 이유) 그래서 저는 올해 1월에 2심 법정인 수원법원에 다시 섰습니다. 2심에선 두 명의 증인이 재판정에 서주었습니다. 두 명의 증인은 1차 희망버스를 취재했던 언론인과 언론학회 교수였습니다. 증인은 신문법상 ‘기자의 취재원 접근권’에 대해 전문가로서 증언해주었습니다.

무척이나 바쁜 분들을 증인으로 수원법원까지 불러들여서 미안한 마음이 앞섰습니다. 아마 저만을 위한 법정이었다면 죄송스런 마음에 증인을 서 주십사 말도 꺼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판결이 미칠 다른 사건이 걱정이 되었기 때문에 부탁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1심 2심 법원을 들락거리면서 제가 크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재판에선 유죄냐 무죄냐 그 판결이 제일 중요하지만 ‘지리한 법정 공방’ 그 자체만으로도 재판 당사자는 충분히 힘겨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가 셋인 제가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왕복 네다섯 시간이 걸리는 수원법원으로 재판을 받으러 다녀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경찰의 소환장을 받았을 때 중 2였던 첫째는 어느덧 고등학교 1학년이 돼 있습니다. 한참 예민해진 아이에게 “엄마 오늘 재판이 있어” 하고 이야기를 할 때면 ‘엄마 역할’을 못하고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오후 재판 때마다 유치원에 다니는 막내는 초등학교 6학년인 둘째가 돌봐야 했습니다. 재판에 한쪽 발이 묶인 저는 언제나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재판에 한쪽 발이 묶인 삼형제 엄마…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 부산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해고를 반대하며 희망버스에 참가한 시민들이 2012년 5월 9일 오전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서 ‘희망의 버스 사법탄압에 맞서는 돌려차기 기자회견’을 열고 희망버스에 대한 무분별한 기소와 조사를 규탄하고 있다. ⓒ 유성호

지난 4월 18일, 그렇게 힘겨웠던 네 차례의 2심 재판이 다행히 무죄판결로 끝이 났습니다. 2심 판결문에는 “언론사 기자는 법에 의해 집회나 시위 현장에 출입하는 것을 보장받고 있으므로 피고인들이 희망버스 참가자들과 함께 이동한 것은 기자의 직업의식에 비춰 자연스런 행위”라 했습니다. 무척 기뻤습니다.

하지만 판사의 무죄 선고만으로 무죄가 확정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판사의 판결이 있고 일주일 내 검사가 상고를 안 해야 무죄가 확정이 됩니다. 2심 무죄판결을 받고나서 제 관심은 검사의 상고 여부로 바뀌었습니다.

일주일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던 지난주에 저는 길을 가다가 5000원짜리 지폐를 발견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땡잡았다고 좋아했을 텐데 저는 돈을 집고 망설이다 돈을 있던 자리에 내려놓았습니다. 5000원 한 장 잘못 주웠다가 중요한 일에 부정 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검사의 상고기일 마지막 날, 오후 5시 변호사에게 문자가 왔습니다.

검사가 상고했습니다

결국, 제 사건은 대법원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정말 미안하게도 그리 바쁜 판사와 검사, 그리고 변호사가 또 다시 저의 유무죄를 가리기 위해서 많은 시간 공을 들여 애써야 합니다. 무죄가 나와야 본전인 이 재판을 위해서 저의 변호사는 또 얼마나 고생을 해야 하고 저는 또 얼마나 마음을 졸여야 할까요.

솔직히 재판이 이렇게 길어질 줄 알았다면 정식재판은 신청하지도 않고 벌금 200만 원을 내버렸을 겁니다. 길어진 재판 때문에 정식재판을 청구했던 것이 후회됩니다. 하지만 젊은 엄마의 눈물을 한 편의 기사에 담은 제 행동에는 조금의 후회도 없습니다. 그 젊은 엄마의 가슴 아픈 사연을 누군가는 우리 사회에 알려야 하니까요. 설령 제가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강정민(ho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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